유명 조선국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우부빈객 증시 정헌 임공 신도비명 병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이사 소세양(蘇世讓)이 글을 짓고,
봉헌대부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글을 쓰다.
주부(主簿) 임중신(任重臣)은 이조 참판 정유길(鄭惟吉)이 지은 행장(行狀)을 안고 상심하여 피곤한 모습으로 호남 수백리 길을 멀다 아니하고 나를 찾아 시골까지 와서는 그의 아버지 참찬(參贊) 정헌공(貞憲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부탁하니,
아! 슬프다. 나는 사경(士經 : 임권)과 같은 해에 태어나 결발(結髮 : 어른이 됨) 때부터 교유하며 지냈는데 머리가 백발이 되어 서로 이별하여 천애(天涯)15)에 혼자 되어 침통함이 마음 속에 가득한데 내 차마 사경을 위하여 비명(碑銘)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지금 나는 늙고 병들어 궤궤()16)하고 문장과 필묵을 잊은 지 오래되어 사경의 행적을 칭송함에 빠짐이 없이 사실대로 기록할 수 있겠는가! 사양하기를 거듭하였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여 명(銘)을 한다.
행장을 살펴보니 임씨는 풍천(豊川)의 대성(大姓)으로 대대로 현달(顯達)17)한 인물들이 많아서 자세하게 국승(國乘)18)에 실려 있다. 공의 이름은 권(權)이고 사경은 그의 자(字)이다.
아버지 유겸(由謙)은 공조 판서로 소간공(昭簡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한(漢)으로 수안 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하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은 효돈(孝敦)으로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역임하고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양대(兩代)에 걸쳐 증직된 것은 모두 소간공이 귀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로 청단 찰방(靑丹察訪)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증직된 신(愼)의 딸인데,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 17) 정월 초5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겨우 이(齒)를 갈 나이에 능히 글을 읽고 그 대의(大義)를 알았으며, 아직 15세가 되기 전에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두루 읽고 외워 그 형인 사균(士鈞)과 함께 학문에 심혈을 기울여 침식을 잃다시피 하니 부모님이 휴식을 권하기도 하였다.
소간공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모두 재주가 많았으며 그 중에 공과 사균이 실제 백미(白眉)였다. 사균은 즉 관찰공(觀察公) 추(樞)이다. 관찰공이 일찍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내 동생은 학문이 바르고 크며 지조가 굳고 과감하여 진실로 우리 집안의 천리마(千里馬)다”라고 하였다.
정묘년(1507, 중종 2) 진사시(進士試)에 오르고 계유년(1513, 중종 8) 을과(乙科)에 등제하여 형제가 대명(大名)을 짊어지고 계속 높은 직책으로 승진, 옥관자(玉貫子)19)로 조정에 서니 단정한 풍채와 청렴한 지조로서 선망하는 이들의 눈에 쌍주(雙珠)20)가 되었다.
처음에 훈련원에 권지(權知)로 임명되었다가 승문원 부정자를 역임하고 예문관 검열을 거쳐 홍문관에 뽑히여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고 경연(經筵)의 전경(典經)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하였다. 이어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가 병 때문에 체직(遞職 : 직무를 바꿈)하였다.
을해년(1515, 중종 10)에 다시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고 이어 저작 박사(著作博士)를 역임하였는데 언사(言事 : 간쟁하는 말)에 연루, 강등되어 호분위 부사정(虎賁尉副司正)이 되었다가 마침내 부수찬 지제교로 발탁되어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하였다.
이어 교리로 승진하였다가 (…결락…) 년 정언(正言)이 되니 수찬과 교리를 세 번 역임하였고, 이조 정랑을 두 번하였으며 (…결락…) 정랑과 사헌부 지평을 네 번 역임하였는데 모두 청선(淸選 : 청렴한 관직)이었다.
신사년(1521 중종 16)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벼슬을 사직하였고, 상복을 벗은 후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옮기었다. 을유년(1525, 중종 20) 의정부 검상으로 천거, 제수되었다가 사인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이 되었다.
인묘(仁廟 : 인종)가 동궁으로 있을 때 고명한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의 좌우빈객(左右賓客)을 취하여 배우니 모두 한결같이 선망하였는데 공의 강설(講說)은 자세하고 정확하며 음(音)과 토(吐)가 분명하니 인종(仁宗)께서 매번 주의깊게 경청하였다.
서연(書筵 : 세자가 글을 읽는 곳)에서 토론한 말들을 매일 반드시 기록하여 장계로 올리니 중종(中宗)께서 보시고 공에게 경계하기를 권하며 말씀하시기를 “세자를 보필하고 인도하는 임무를 고려해보니 이와같이 하는 것은 부당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병술년(1526, 중종 21)에 다시 사인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집의로 발탁되었고, 이어 홍문관 전한으로 옮기었다.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두루 당시 재상들의 탐독(貪 : 재물을 탐내어 마음을 더럽힘)함을 논하니, 임금께서 그 성명(姓名)을 물으매 거리낌없이 지적하여 이름을 밝히니 조정 안팎이 모두 두려워하였고, 정해년(1527, 중종 22)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공은 오래도록 논사(論思 : 간언하는 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알면서 말하지 않은 일이 없고, 말을 할 때에는 끝까지 다하지 않은 일이 없으니 의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표리가 분명하였으니 당시의 강관(講官)들은 모두 스스로 이에 미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정해년) 4월 아버지 소간공의 상을 당하여 (사임하였다가) 기축년(1529, 중종 24) 상을 마치고 장악원 정에 배임되었다. (당시) 평안도 이산군(理山郡)에서 포로를 잡았다가 놓친 사실이 있어서 이 일로 연루되어 옥에 죄인이 가득하니 조정에서는 장차 관리를 보내어 이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마땅한 인물이 없던 차에 대신들이 공을 천거함에, 공이 그곳에 가서 그 상황을 소상히 살피어 해결하니 당시 공론이 쾌재를 불렀다.
경인년(1530 중종 25) 다시 사인으로 종부시 정이 되었는데, 이어 (임금께서) 전지(傳旨)하여 말씀하시기를 “모(某 : 공을 가리킴)는 매우 강직하고 명철하여 반드시 종친 중에서 국법을 어기는 자를 잡을 것이니 이 때문에 그 직을 제수하노라”라고 하니, 이를 들은 종실들은 두려워 위축되어 감히 비위를 저질르지 못하였다.
가을에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었으나 이조 판서 장순손(張順孫)이 친히 전형(銓衡)하면서 공이 딱딱하고 강직함에 기피하여 사섬시 정으로 옮겨 임명했다. 이에 당시 명망있는 재상 한 분이 있어 힐책하며 말하기를 “모(某)는 마땅히 간쟁(諫諍)하는 지위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밖으로 옮기려 하는가”라고 하니, 장순손이 크게 노하여 즉시 장계를 올리어 말하기를 “모(某)는 청류(淸流 : 청렴결백)한 인물로 간쟁하는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다른 벼슬로 옮기려 하니 시론(時論)에 신을 헐뜯는 자가 있어 상소를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홍문관에서 즉시 상소하여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임금께서 모두 덮어두고 묻지 않았다. 혹간 공에게 사퇴하라고 권하기도 하고 장순손을 찾아가 해명하라고도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지난번에 청류로서 패한 사람들이 모두 나의 친우들인데 내 스스로 결백함을 증명하지 아니하고 어찌 사퇴하며, 또 어찌 가서 지조(志操)를 더욱 떨쳐 서로 쳐서 돌아보지 않음을 보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상(喪)에는 국고의 비축물이 크게 모자라 삼도감(三都監)에서 공용으로 쓰는 물자를 시중에서 모두 구입하여 쓰고는 대금을 갚지 아니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매우 자자하였으나 공이 장계를 올려 모두 지급하여 주도록 청하여 조치하였다.
종부시와 사복시의 정을 역임하고 보덕으로 전보할 때, 김안로(金安老)가 적소(謫所 : 귀양지)에서 풀려 돌아와 차츰 권력을 잡고서 부박(浮薄)21)하고 공명(功名)을 좋아하는 자들을 써서 안로와 인척인 자들과 서로 대궐에 붕당을 체결하여 지나왔다.
공이 집의로 있을 때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번갈아 폐단을 들어 상소하였는데, 그 상소문 속에는 자기들에게 붙는 자는 진급시키고, 그들과 다른 자는 배척한다는 말이 있었다. 대사간 심언광(沈彦光)이 이를 보고는 화를 내며 말하기를 “이와 같은 시기에 어찌 이런 버릇이 있는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지금 큰 근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때 언광이 그 세력에 붙어 있었는데 언광이 미워하여 죄를 꾸며 (공을) 귀양을 보내고자 하니 중종께서 그 시말을 아시고 다만 그 직책만을 교체하였다. 이에 공은 진의가 떳떳했음을 자처하여 처자를 이끌고 예산촌(禮山村) 집으로 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장차 여생을 마치기로 하였다.
정유년(1537, 중종 32) 겨울 세 명의 흉한들이 죄를 짓고 물러나며 참소를 당하고 여러 선비들과 배척받던 자들이 모두 설원(雪 : 누명을 벗음)되었으므로 무술년(1538, 중종 33) 봄 공 역시 봉상시 부정으로 복직하였고, 다시 군자감과 군기 정으로 전직함을 제수받았으며, 5월에는 특별히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참지로 옮기었다.
기해년(1539, 중종 34) 동지사(冬至使)로 명(明)에 갈 때 종계 개정(宗系改正: 조선 왕실의 성씨를 바로잡음)을 맡은 주청사(奏請使)와 함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임금으로부터 하서(下書)가 와 이르기를 “경 등은 일이 비록 다르나 서로 상의하여 돕고, 만일 한 사람이 유고하면 가히 대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연경에 도착하니 주청사가 병으로 나오지 못함에 공은 홀로 명의 예부(禮部)에 나아가 사실을 변명하였다. 진언할 때 말과 뜻이 성실하였으므로 황제의 윤허를 얻어 돌아왔는데 그 논공행상에 공의 언급이 없었지만 공은 한마디 불평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처음 이를 아는 사람은 적었으나 차츰 많은 사람이 이를 알고는 주청사의 양보없음을 비웃었다.
공이 환국(還國)하려 할 때 병 중에 있었으나 조령(朝令 : 조정의 명령)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자제로 하여금 부축을 받아 북쪽을 향하여 다섯 번 절하고 나오니 중국인들이 그 예법에 밝은 것을 탄복하였다.
경자년(1540 중종 35) 가선대부로 특진되어 예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발탁되었다가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공은 연경으로부터 돌아온 후 쇠약하여져 날로 병세가 심해져 감히 임지에 부임하지도 못하고 사퇴함에 다시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영남지방은 땅이 넓고 사물이 많아서 소송의 일이 팔도에서 제일 많은 곳이라, 조정에서는 신망이 두터운 인물을 뽑아서 부임시키려 하였는데 소간공과 공의 형제가 계속하여 뽑히니 비록 공은 부임하지 못하였으나 세상에서는 모두 부러워하였다.
신축년(1541 중종 36) 세자우부빈객을 겸직하다가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나갔는데 그해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매 공이 심혈을 경주하여 구휼하니 모두 구제되었으나 너무 심력을 쏟은 나머지 옛 병이 재발하여 관찰사직을 사임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언자(言者)들이 밀부(密符 : 병부, 즉 임금이 준 표식)를 친히 반납하지 않음을 들어 파직을 논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인년(1542, 중종 37) 자헌대부로 특진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사람을 뽑아 관직을 맡아 공평하게 군정(軍政)을 다스렸으며, 계묘년(1543, 중종 38) 가을 사임을 청하니 병조 판서직을 그만두게 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갑진년(1544, 중종 39) 예조 판서로 옮기어 지의금부사를 겸하였고, 겨울에 중종께서 승하하시자 빈전제조(殯殿提調)가 되어 창졸간에 일어난 국상(國喪)이었으나 예법에 어긋남이 없이 무사히 치루었다.
을사년(1545, 인종 원년) 인종이 계속하여 공에게 산릉(山陵)의 일을 맡기니, 몸소 친히 맡은 바에 정성을 다하여 일을 마치었다. 이때 나이 어리면서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있어 방자하게 사리에 어긋나는 논란을 벌이며 기염을 토하면서 서로 자기가 잘한 양하며 공을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공은 홀로 큰소리로 이를 배척하였다.
또 말하기를 “명분(名分)이 심히 중하나 곽순(郭珣)과 같이 천한 출신이 어찌 시종(侍從)하는 반열에 들어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니, 언관들을 의지하며 곽순을 위하는 자들을 극력 배척하고 몰아내려 하였으나 마침내 그들에 의하여 파직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래되지 않아 지금의 임금(명종)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곽순의 무리들이 중죄를 지어 잡히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상사(喪祀) 때와 제사(祭祀) 때, 그리고 책봉식(冊封式)에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공은 공조 판서로서 접반사가 되어 그들을 대접함에 예의에 어긋남이 없으니 중국 사신들도 극구 칭찬하였다.
병오년(1546, 명종 원년) 위사 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으로 품계를 더하여 정헌대부가 되어 지춘추관을 겸임하여 양조(兩朝 : 중종과 인종)의 실록(實錄)을 감수하였다. 가을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올랐다가 다시 좌참찬으로 승진하여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경술년(1550 명종 5) 실록을 전주사고(全州史庫)로 봉안할 때, 특별히 임금께서 전송하는 잔치를 한강 위에서 베풀어 주시며 총애하였다.
신해년(1551 명종 6) 다시 양종(兩宗)과 선과(禪科)를 뽑는 것으로 입안하자 공이 즉시 상소하여 수천 마디의 말로 이단(異端)의 해로움과 새 정부에게 누가 됨을 강조하며 장차 사찰을 부수고 실력으로 대결하고자 하니, 여러 대신들이 상소함에 문장이 분격에 지나쳐 신하로서 임금에게 고하는 예의가 아님을 들어 상소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를 듣지 않고 글을 올렸다. 또 중전께서 일찍이 친정집에 간다고 나간 일이 있었는데 그날 풍재(風 : 바람의 재앙)가 있었으므로 공이 경연(經筵)에서 지극히 말하기를 “사가(私家)는 국모(國母)께서 강림하실 곳이 못되며, 또 친정집에 만약 유식한 인물이 있으면 이를 일러 지나친 거동을 못하시게 하여야 하거늘, 이변이 나타나니 하늘의 뜻을 가히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말이 심히 간절하고 곧았다.
이때 의정(議政) 심연원(沈連源)이 명종의 처조부로서 마침 입시(入侍)하여 있다가 두렵고 떨려서 어찌 할 바를 모르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니 좌우에서 듣던 자들은 모두 공이 위태롭게 될까 염려하였다.
을묘년(1555, 명종 10)에 나이가 많음을 들어 사임하고자 하였으나 임금께서 전지(傳旨)하여 말씀하시기를 “경은 세 임금을 섬긴 구신(舊臣)으로 기력 또한 건강한데 어찌 가히 휴퇴(休退)하려 하느냐? 더 머물러 있으라”고 하시며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의정부에 12년간이나 있으면서 나라에 큰 일이 있기만 하면 참고하여 결단을 내리니 조야(朝野)에서 의지하는 바가 컸다.
정사년(1557, 명종 12) 6월 17일 집에서 별세하니 춘추가 72세였다. 병을 앓기 시작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말하는 것이 모두 나라 근심으로 집안 일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병이 심할 때 주육(酒肉)의 하사가 있으면 공은 부축을 받고 일어나 관대(冠帶)를 정제하고 먼저 스스로 맛을 보고는 문중에 나누어 주어 인군(仁君)께서 하사하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으니 정신이 어지럽지 않음은 이와 같았다.
임금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심히 슬퍼하며 2일간이나 조회를 보지 않았고 부의(賻儀)를 많고 빈번하게 보내어 다음날에는 또 채소와 과일의 소(素)한 것을 하사하시니 이는 특별한 분부이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소양이 많아서 동정(動靜)의 절도가 있었고 말함에 과묵하고 법도가 있었다. 부모님을 효도로 섬기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친구간에는 정이 많고 인척간에는 화목하여 어려운 사람을 구휼함을 모두 보통의 일로 여겼다.
타인과 교제함에는 승락하고 신용함이 묵중하여 의리가 있었으며, 비록 정직함을 지키고 간사함을 미워하였지만 관용(寬容)으로 용서한 것이 많아 (…결락…) 좋아하지 않아서 여러 번 사화를 겪어도 홀로 그 화(禍)에서 벗어났다. 또 더욱 사치하고 호화로운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담담하게 생활하여 대관에 오랫동안 있었으면서도 집안에 남긴 재산이 없었으며, 거처하는 방을 ‘정용(靜容)’이라 하고 새벽녘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는 종일토록 눕지 않았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매번 훈계하여 말하기를 “내 평생 어찌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겠느냐? 다만 혼자 있으면서도 마음을 속이지 않고 사람과 교제할 때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집을 남산(南山) 기슭에 짓고 각종 서적을 모으고 화초도 기르며 초연히 바깥 세상의 일을 생각하여 세상 근심을 겪지 않은 사람 같았으나 대궐에 들어가 강석(講席)에 이르러서 강론할 때는 말뜻이 영특하고 나라의 그릇된 정사가 있으면 면전에서도 배척함을 피하지 않았으니 생강과 겨자와 같은 매운 성품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한결같았다. 여러차례 곤욕을 당하였으면서도 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으니 참으로 하늘에서 내린 순강(純剛)한 기질이라고 일컬을 만하였으며 이는 옛부터 가문대로 내려온 곧은 절개였다.
공은 진사(進士) 신제담(辛悌聃)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영산(靈山)의 대족(大族)으로 수문전(修文殿) 대제학을 지낸 인손(引孫)의 손녀이다. 2남 2녀를 두니 큰 아들은 곧 중신(重臣)으로 계묘년 진사에 급제하여 사복시 주부이다. 둘째는 의신(毅臣)으로 의영고 령(義盈庫令)이며, 딸은 경상도 관찰사 이감(李戡)에게 출가하였다.
주부(主簿 : 큰아들 중신)는 현감 이옹(李壅)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으니 증(拯)이요, 영(令 : 둘째 아들 의신)은 현감 한팽조(韓彭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으니 장자는 지(持)요, 차자는 택(擇)이며 셋째는 공(拱)이다. 관찰(경상도 관찰사 이감)은 남녀 각각 하나씩 두었으니 아들은 성헌(成憲)으로 종실(宗室) 광원수(廣原守)의 딸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고, 딸은 유사(儒士) 윤유후(尹裕後)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해 8월 22일 양주(楊州) 치소의 북쪽 천보산(天寶山)에 장례를 지내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내 젊어서 유학(遊學)할 때 여러 무리 중에서 공의 형제가 군계일학(群鷄一鶴)임을 보고 서로 친하여 막역한 사이가 되었는데 지난 갑오년(甲午年) 내가 연경에 가게 되었을 때 먼저 연경에 갔던 사균(士均)이 작고함을 듣고 십참로(十站路) 가운데서 통곡하였고,
지금 또 공을 위하여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두 난의 풍류가 이로써 다하는 구나! 내 어찌 옛 친구들을 붙들지 못하고 슬퍼만 하겠는가! 명에 이르기를,
오직 공(公)은 시례(詩禮)의 집안에 태어나니 판서의 아버지와 관찰사의 형이로다. 집안에서 공맹(孔孟)의 도(道)를 가르치어 효우(孝友)가 돈독하였고 관각(館閣 : 홍문관과 예문관)을 두루 거쳐 세 임금을 모시면서 거슬리는 일은 굳게 항쟁하고 외로이 충성을 다해 절개를 굳게 하였으니 옛 사람에게서도 드문 충성이었도다.
백 번 달군 강한 철은 마침내 엉크러진 지름이 아니고 대나무와 잣나무의 지조는 바람과 서리로도 움직이지 않는도다. 한(漢)나라 급암(汲)은 과(過)함을 보완하고 끼친 것은 살리었으며 당(唐)나라가 한휴(漢休)를 등용함에 임금은 바르고 백성은 살찌었도다.
아침 저녁으로 관직에 있었지만 십 년 세월에 싸리문 뿐 하늘이여 이다지도 생명을 빨리 빼앗아 가느뇨. 한번 죽음은 백 사람으로도 대신할 수 없구나. 저 울창한 천보산이여! 아름다운 정기만 거두어 쌓아두누나. 공의 영령이 이곳에 있으니 지나는 이여! 반드시 본받으라.
가정(嘉靖) 39년(1560 명종 15) 10월 일에 비석을 세우고 시(詩)로 조문하다.
슬프다! 이 몸과 구천이 서로 막혔으니 백발은 눈물을 뿌리며 새로 묘비명을 쓰노라! 세 임금을 모시며 일한 것은 응당 역사에 남을 것이나 한 조각의 비석에는 청(請)을 다 쓰지 못하는구나. 딸기는 꺾이고 난초는 말랐으나 향기는 없어지지 않는 것이요, 용(龍)은 떠나고 범이 갔으나 그 자취는 뚜렷하도다. 이제 훌륭한 자제를 만나 밤새워 정담을 나누니 상대함에 의연하여 옛친구를 닮았구나.
........................................................................................ ■ 이석: 경기도 내에 있으니 언제 한번 찾아가봐야 할텐데... -[10/23-17:13]-